미국 AI 영상 생성 스타트업 힉스필드(Higgsfield)가 아시아 첫 거점으로 서울을 택한 배경에는 자체 모델을 만들지 않는 독특한 전략이 있다. 힉스필드 김민성 아시아태평양(APAC) 디렉터는 국내 첫 인터뷰에서 “한국이 인공지능(AI) 파운데이션 모델 개발 자체에서는 글로벌 빅테크에 비해 다소 늦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모델을 활용하는 역량에서는 한국이 세계 1위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라고 밝혔다. 김 디렉터는 지난 5월 서울에 부임했으며, 이후 지난 6월 FSN 계열사인 부스터즈·애드쿠아에 힉스필드가 도입됐고 8월에는 코엑스 AI 서밋에 참가하며 국내 행보를 넓혔다.

모델 회사가 아니라 플랫폼 회사
힉스필드는 알렉스 마슈라보프(전 스냅 생성형 AI 리더)와 에르자트 둘라트가 공동창업했다. 바이트댄스의 시댄스, 콰이쇼우의 클링, 오픈AI의 소라, 구글의 Veo 등 영상 모델 7종과 이미지 모델 4종, 총 11종의 생성 모델을 하나의 플랫폼에 통합해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자체 모델 개발 대신 여러 업체의 모델을 모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오케스트레이터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김 디렉터는 “지난해에는 나노 바나나 프로가 대세였고 올해 초는 클링, 지금은 시댄스가 인기”라며 “특정 원 모델사 하나에 고착화되어 있으면 트렌드가 바뀔 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통합 구조를 자동화한 것이 ‘슈퍼컴퓨터(Supercomputer)’다. 사용자의 목적에 맞는 모델을 자동으로 선택해주는 제품으로, 엔비디아가 슈퍼컴퓨터 2.0 기반 에이전트 툴킷을 제공한다. 김 디렉터는 “사용자가 직접 각 엔진을 붙여 쓸 때는 얻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용으로는 광고 소재를 자동 생성하는 ‘마케팅 스튜디오(Marketing Studio)’를 운영 중인데, 공개 첫 30일 동안 6만8000명의 마케터가 모였고 전체 활동 중 상업 광고 비중이 70%에 달한다.
왜 한국인가
김 디렉터는 한국을 아시아 첫 거점으로 택한 이유를 산업 구조에서 찾았다. “K팝, 드라마, 광고, 웹툰까지 시각 콘텐츠에 의존하는 산업들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고, 이 산업들이 이미 글로벌 플랫폼을 겨냥해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해외 진출을 전제로 한 시각 콘텐츠 수요가 원래 높은 나라인데 여기에 생성형 AI가 제작 속도의 병목을 풀어주면서 채택이 급격히 빨라졌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게임, 전자, 커머스, 콘텐츠 제작 스튜디오, 패션까지 계약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도입 기업의 성격도 변화하고 있다. 김 디렉터는 “최근에는 컴플라이언스와 법무 검토까지 필요한 대기업급 문의가 늘고 있는데, 시장이 얼리어답터의 실험에서 대기업의 정식 도입 검토로 단계가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로 본다”고 말했다. 현재 힉스필드는 6개 대륙 1만2000여 개 기업이 사용하고 있으며, 포춘 500대 기업 중 390곳이 도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측정 데이터를 들여다볼수록 확인하게 된 건 크리에이티브 자체가 성과를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사실이었다”며 “성과는 매체 집행이나 타겟팅보다도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에서 갈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가파른 성장세와 시장 전망
힉스필드는 올해 1월 기업가치 13억 달러를 인정받은 뒤, 8월 미래에셋캐피탈 등이 참여한 시리즈B에서 4억 달러를 투자받으며 기업가치가 54억 달러로 뛰었다. 8개월 만에 네 배 이상 오른 셈이다. 연환산 매출은 7억 달러, 사용자는 238개국 3000만 명에 이른다.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AI 영상 생성기 시장 규모는 9억4600만 달러이며, 편집·워크플로를 포함할 경우 메티큘러스리서치 추산 시장 규모는 36억7000만 달러, 2036년에는 248억9000만 달러까지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 디렉터는 글로벌 표준화 전략의 한계도 인정했다. “글로벌 플랫폼은 수백 개 국가와 수많은 산업군을 동시에 상대해야 해 구조적으로 표준화된 형태로 갈 수밖에 없다”며 “이게 글로벌 솔루션이 지는 지점이라면 지는 지점이다. 특히 아시아 국가에서는 그렇다”고 말했다. 대신 그는 “툴의 정체성은 회사가 규정하는 게 아니라 고객의 목적이 규정한다”는 점을 강조하며 확장성과 빠른 모델 업데이트를 강점으로 제시했다.
AI 아이돌은 콘텐츠 사업 아닌 실험
힉스필드는 캐릭터·톤 일관성을 유지하는 자체 기술 ‘소울(Soul)’을 개발해 AI 아이돌 ‘키온(Kion)’과 AI 걸그룹 ‘제피어(Zephyr)’를 선보였다. 제피어는 제작 기간이 5일에 불과했다. 다만 김 디렉터는 “K팝이든 영화든 콘텐츠 시장에 직접 진출할 계획도 의향도 없습니다. 키온과 제피어는 이 플랫폼으로 실제로 무엇까지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한 자체 실험이자 쇼케이스였고, 상업적 목적을 위한 자체 제작을 계속 이어갈 계획은 없습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힉스필드는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플랫폼을 제공하는 회사입니다. 저희의 역할은 이 플랫폼을 활용해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어 하는 크리에이터와 제작사를 지원하는 것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제작 속도가 빨라진 것에 대해서는 “AI 콘텐츠는 실패해도 되는 비용 구조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투입 기간이 짧으면 실패의 비용도 그만큼 작아집니다”라면서도 “5일 만에 만들 수 있다는 건 제작의 병목이 사라졌다는 뜻이지 좋은 콘텐츠가 자동으로 나온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모든 콘텐츠에는 결국 서사가 뒷받침돼야 한다”며 “지금까지 영상 제작 시장은 수준 높은 결과물과 생산성이 결국 자본의 논리에 비례하는 구조였다”고 짚었다. 이어 “제작 과정이 간소화돼도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고 그것을 완성하는 역량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라고 말했다.
IP·규제 대응은 어떻게
생성 결과물의 초상권과 저작권에 대해 김 디렉터는 “제작물의 활용과 그로 인한 법적 책임은 실제 제작 주체에게 있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은 올해 1월 22일 AI 기본법을 시행해 AI 생성물에 대한 표시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이에 대해 김 디렉터는 “한국 AI 기본법이 요구하는 표시 의무 등 로컬 규제 대응은 검토하고 있고, 필요하다면 한국 시장에 한해 별도 방안을 마련할 수 있다”고 밝혔다. 현재 플랫폼 차원의 자동 표시 기능은 없는 상태다.

김 디렉터는 튠, 오페라 미디어웍스(현 애드콜로니), 싱귤러 등을 거치고 국내 애드옵스 기업 아드리엘에서 부대표를 지내며 마케팅 업계에서 15년 넘게 경력을 쌓았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은 AI 확산으로 디자인 직군의 외주 시장이 축소 국면에 들어섰다고 분석한 바 있는데, 김 디렉터 역시 생성형 AI로 제작비가 낮아지는 변화가 기존 외주 제작 생태계의 수익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업계가 계속 고민해야 할 지점으로 꼽았다. 플랫폼을 표준화하되 고객의 목적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그의 전략이 한국 시장에서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가 다음 관전 포인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