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만든 AI 기능이 6개월 뒤 거대언어모델(LLM)의 기본 기능으로 들어가거나 경쟁사에 복제될 수 있다면, 스타트업은 무엇으로 버텨야 할까. 스타트업 자문가이자 엔젤투자자인 한기용 업젠(Upzen) 대표는 인터뷰에서 기술만으로는 영구적 진입장벽을 만들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한 대표는 몰로코, 팀블라인드, 인프런, 코스닥 상장사 노을 등 국내외 스타트업을 자문했다. 셀렉트스타, 차트메트릭, 굿타임 등에 엔젤투자했고, K2G 펀드의 유한책임조합원(LP)이자 한국과 미국 스타트업 생태계의 멘토로도 활동해왔다. 저서로 『실패는 나침판이다』가 있다.

제품 개발 비용은 줄고, 복제 속도는 빨라졌다
한 대표는 AI 시대에 기술만으로 경쟁 우위를 오래 지키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제품을 만드는 비용과 시간이 크게 줄었고, 기능이 LLM 기본 기능으로 들어가거나 경쟁사가 따라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복제 속도가 빨라질수록 경쟁자가 따라오기 어려운 자산은 기술 바깥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가 꼽은 복제하기 어려운 자산은 도메인 데이터, 고객 업무 흐름, 규제 진입장벽, 영업 역량이다.
대표 사례로는 2017년 엔젤투자한 음악 데이터 플랫폼 차트메트릭(Chartmetric)을 들었다. 한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 자체가 평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음악 산업 데이터를 오랜 기간 수집하고 정리해 업계 실무자들이 실제 의사결정에 사용하는 형태로 다듬어낸 구조는 경쟁자가 모델 하나를 잘 만든다고 하루아침에 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영업에 대한 관점도 같은 선상에 있다. 그는 B2B 영업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B2B 영업은 30분 만에 기술과 가격을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프레젠테이션이 아닙니다. 고객의 진짜 어려움이 무엇인지 묻고 들으며 다음 미팅을 이어가는 신뢰 구축 과정이어야 계약이 완성됩니다.”
창업자 평가 기준과 기술부채의 함정
한 대표는 극초기 스타트업의 창업자를 볼 때 오래 버틸 생각과 불확실성을 대하는 태도를 가장 중요하게 본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제가 창업자를 볼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오래 버틸 생각을 하고 있는지와 불확실성을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인지입니다. 창업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고 시간이 걸리며, 이 과정에서 크고 작은 실패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술부채에 대한 진단도 내놨다. 한 대표는 스타트업이 빠지는 대표적인 기술부채가 대충 만든 코드보다 미래를 너무 앞서 준비하다 만든 불필요한 코드, 즉 오버엔지니어링(Over-engineering)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코스닥 상장사나 오랜 연구를 거친 연구개발(R&D)팀은 다른 함정에 빠지기 쉽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또 코스닥 상장사나 오랜 연구를 거친 연구개발(R&D)팀일수록 ‘우리가 깎아온 20년 기술을 AI가 쉽게 따라잡지 못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관련 분야 인턴을 뽑아 AI만으로 기존 기술을 복제해보는 시도 등을 통해 바깥의 변화를 직접 확인해야 합니다.”

AI가 속도를 끌어올릴수록 인재밀도가 중요해진다
AI가 기술 개발 속도를 끌어올리면서 조직의 대응력은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 한 대표의 설명이다. 성장할수록 인재밀도를 높이려면 대표가 채용·피드백·조직문화를 관리해야 한다고 했다.
“잘 되는 회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팀의 인재밀도가 좋아지는 형태로 발전합니다. 이는 창업자나 대표가 인적자원관리(HR)에 신경 쓰지 않는다면 저절로 발생하지 않습니다. 인정에 사로잡혀 조직을 망치지 않고, 성장을 멈춘 초기 멤버에게 빠르게 피드백을 전달해 변화를 유도해야 합니다. 태도가 부정적인 오래된 구성원이 있다면 최악의 경우 잘 헤어질 방법까지 찾아야 합니다.”
한 대표가 직접 경험한 온라인 교육 플랫폼 유데미(Udemy)가 사례로 나왔다. 창업자는 에렌 발리(Eren Bali)와 옥타이 차글라르(Oktay Caglar)다. 그는 유데미의 초기 팀 구성과 성장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초기 미국 내 기반이 없어 대학 후배들 위주로 팀을 구성했지만, 제품시장적합성을 찾고 고속 성장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들보다 훨씬 경험 많고 똑똑한 엔지니어들을 계속 채용했습니다. 일의 결과를 내는 사람이 인정받고 질문과 실수가 수용되는 심리적 안전감도 만들어졌고요.”
미국 진출은 한 번의 승부가 아니다
한국 스타트업의 미국 진출에 대해 한 대표는 한 번의 승부가 아니라 반복 방문과 짧은 학습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분기에 한 번씩 약 2주 현지를 방문하는 방식을 권했다. 다만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가 가장 안타깝게 보는 경우는 4주 동안 체류하며 이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비장함으로 오는 창업자들이다.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4주 동안 체류하며 이번에 끝장을 보겠다’는 비장함으로 오는 창업자들입니다. 4주 동안 계약이나 투자 유치가 안 나오면 ‘실패했다’고 단정 짓고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미국 시장에 대해 비로소 첫 배움을 얻은 것입니다.”
한 대표는 창업자의 의지만으로 해외 진출을 밀어붙이면 현지 상황을 충분히 공유하지 못해 의사소통 비용과 자본 부담이 커질 수 있다고 했다. 비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체류비나 항공권보다 더 큰 비용은 창업자가 자리를 비운 한 달 동안 한국 팀이 현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공백으로 남겨지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사람을 채용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비용은 한국의 3~4배에 달합니다. 충분히 배우기 전에 조직부터 옮기기보다 창업자와 핵심 인력이 반복해서 오가며 시장을 배우고 관계를 쌓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창업자와 CEO는 다른 역할
한 대표는 창업자와 CEO를 구분해 봐야 한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 근무한 스타트업 7곳 중 5곳에서 창업자가 CEO 자리에서 교체되는 과정을 직접 겪었고, 이 가운데 4곳이 이후 기업공개나 인수합병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야후에 인수된 여성 패션 서비스 기업 폴리보어(Polyvore)를 사례로 들었다. 폴리보어 창업자 파샤 사드리(Pasha Sadri)는 여성 패션이라는 도메인의 한계를 느꼈다. 이에 충성 고객이던 구글 제품관리자(PM) 출신 제스 리(Jess Lee)를 설득해 공동창업자로 영입하고, 대표 자리를 자발적으로 넘겼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두 역할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창업자는 회사를 만든 정체성이지만 CEO는 그 시점에 회사가 필요로 하는 역할입니다.”
미국 이사회는 대표의 역량이 다음 단계에 못 미친다고 보면 외부 경영진을 데려오거나 CEO를 교체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대표는 회사의 가장 큰 자산일 수 있지만 본인의 성장 속도가 느려지면 가장 큰 병목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인터뷰는 KAIA와 벤처스퀘어가 함께 운영하는 스타트업 생태계 기자단을 통해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