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콘텐츠를 대량으로 찍어내는 시대에, 정작 브랜드와 고객의 관계를 회복하는 도구로 물리적 공간과 데이터 분석을 함께 쓰는 회사가 있다. 서울 한남동에서 마케팅 회사 디지털다임(digitalDigm)이 운영하는 복합공간 FEZH(페즈)다. 디지털다임 임종현 대표는 방문자 데이터와 AI 분석을 활용해 조명·음향 등 공간 운영을 조정하지만, 방문자에게는 그 기술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FEZH는 2024년 개관했고, 2026년 독일 iF 디자인 어워드 본상을 수상했다. 코로나19 이전 70~80명이 출근하던 기존 사옥은 코로나19 이후 실제 출근 인원이 20% 이하로 줄면서 용도를 잃었다. 임 대표는 이 변화를 두고 “오피스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꼭 회사에서만 일해야 하는 시대가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이곳이 예전과 같은 개념의 사옥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와서 쉬고 만나고 경험하는 곳을 만들어보기로 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데이터는 뒤에, 경험은 앞에 — 임베디드 테크놀로지
FEZH의 운영 방식은 방문자 데이터와 AI 분석을 활용해 프로그램과 마케팅 전략을 기획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히트맵, 전환율, A/B 테스트 같은 분석 기법으로 방문 패턴을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명과 음향 등 공간의 세부를 조정한다. 하지만 방문자가 마주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이 맞닿는 아날로그적 경험이다. 임 대표는 이런 방식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임베디드 테크놀로지’로 설명한다.
공간 구성은 모로코 도시 페즈(Fes)와 방콕의 더 커먼스(The Commons)에서 영감을 받았다. 4층에는 까사델아구아, 보텍스 갤러리, 블루캣이 있고, 지하에는 D-Square가 자리한다. ‘도시 안의 도시’라는 컨셉으로 설계돼, 서로 다른 성격의 공간들이 하나의 건물 안에서 이어진다.

방문자 수가 아니라 재방문을 지표로
FEZH의 운영 지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왔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시 찾는지다. AI 시대 디지털 콘텐츠가 범람할수록, 실제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의 가치는 오히려 커진다는 판단이 이 지표 설정의 배경이다. 임 대표는 “브랜드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까지 다 불러모을 필요는 없습니다. 브랜드의 핵심 고객 중에서 취향이 분명한 사람들을 초청해 더 심도 깊은 경험을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삼성자산운용, SK텔레콤, 써브웨이, 재규어랜드로버, 한컴, 볼보, 피아제, 로에베, 엘르, 알로, On, LG유플러스, BTS 등 다양한 글로벌·국내 브랜드가 FEZH에서 핵심 고객을 대상으로 심도 있는 브랜드 경험을 진행했다. 유이화 씨도 FEZH와 관련해 언급된 인물 중 하나다. 데이터로 방문자를 분석하되, 그 결과를 다시 불특정 다수를 끄는 데 쓰지 않고 이미 브랜드를 원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깊게 만드는 데 쓰는 방식이다.

콘텐츠가 넘칠수록 커지는 오프라인의 가치
AI 확산으로 콘텐츠 제작 비용과 시간이 줄어들수록, 온라인상의 브랜드 메시지는 더 쉽게 만들어지고 더 쉽게 잊힌다. 디지털다임이 마케팅 회사이면서도 물리적 공간을 직접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데이터와 AI는 운영의 배경으로 쓰고, 사람이 실제로 머무는 시간과 경험은 아날로그적으로 남겨두는 것이 FEZH가 택한 균형이다.
디지털다임은 이 공간을 통해 ‘Be Gentle with the Earth’라는 철학을 내세운다. 지구와 사람, 그리고 관계에 대한 존중을 강조하는 이 철학은 데이터 기반의 정교한 운영과 아날로그적 경험 설계가 공존하는 FEZH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